홍범도평전 -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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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홍범도평전 -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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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평전- 김삼웅



 올해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의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국사에 무지한 나는 호기심과 부끄러움으로 이 책을 골라들었다. 내가 아는 봉오동 전투는 영화 속 이미지만이 선명하다.  낫과 곡괭이를 들고 산간에서 농사를 지었던 사람들이, 낯선 장 총을 들고 결의를 다진다. 수 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을 잘 알고있다는 이점을 활용해, 게릴라 전투,매복 전술로 일본 군을 섬멸한다. 전투의 가능성 따위는 배제하고, 각자 전투의 임무에 투지를 불사른다. 마지막에 나오는 홍범도 (최민수)의 등장에 마음이 웅장해진다.

 홍범도란 인물은 존재는 낯익지만, 실체는 낯선 인물이다. 당대 함께 활동했던 안중근, 김좌진, 유관순과 같은 인물에 비해후대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것 같다.그가 사회주의 색채가 짙다며, 반공주의 시절 배제 당한 이유와, 카자흐스탄이라는 먼 나라에서 생을 마감해, 그의 후손이 없다는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만, 여러 독립운동가의 평전을 집필한 김삼웅 작가의 평전을 읽노라면 그의 겸손, 리더십 또 말도 안되는 현실 앞에서 독립운동을 이끌기 위해서 그가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항변해주고 싶다. 당시 구국 항쟁에 앞장 선 독립 활동을 한 사람 중 전설적이고, 마음의 울림을 받았던 인물이였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868년 평양시 한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자신이 태어나고 며칠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젖 동냥을 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9살이 된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아 신세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였다. 그 후 조선군 나팔수, 제지공장, 승려 등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던 그는 우여곡절 끝에 북청군 안산사에서 산포수 일을 하였고, 그의 사격 솜씨가 대단히 뛰어나, 안산사 포연대 대장으로 뽑혔다. (중간에 그가 승려 생활을 하며 만난 비구니와 사랑에 빠져 신계사를 떠났는데, 불량배를 만나 해우하고 아주 우연히 아들과 함께 상봉하는 장면도 놀랄만한 포인트였다.)

 하지만, 일제는 한국을 병탄하는 과정에 '총포 화약류' 총기 따위들을 모두 거두어들이며 한국인들이 산짐승을 한마리도 잡을 수 없도록 하였다. 일제의 만행을 계기로, 관북지방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식량이 부족하여 겨우 산짐승을 잡으며 생계를 유지하던 산포수들이 일제의 침략에 맞서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한 항쟁이 시작되었다.

 홍범도 의병부대가 봉기 이후 1907년 11월부터 일년 동안 일본군과 벌인 전투는 총 60여회에 이른다. 또한 일본이 그의 부인을 인질로 잡아 회유 작전을 펼치기도 하였으며, 그의 부인은 고문으로 옥사하고 아들은 전사한다. 그는 후일을 도모하며, 간도와 블라디보스톡을 오가며 항일전을 펼친다. 그에 따른 일제의 만행 중 간도참변은 너무나 악랄했다.

 게릴라 전투에 능한 독립군은 전투에 임하다가, 민가로 내려가 "총 한번만 숨겨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실제 가족 행세를 하며, 자연스레 밥을 먹기도 하고, 낫을 들어 약초꾼 행세를 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독립군을 섬멸하기 위해 10월 14일에 공개적으로 간도 출병을 선언한다. 일제가 간도에 파병한 병력은 각 사단에서 차출한 2만 5천여 명의 규모였다. 당시 청산리와 어랑촌 부근으로 이동한 독립군은 약 1천 200여명에 이르렀다.

 홍범도의 부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등 독립부대들은 홍범도 지휘하에 군사통일과 작전을 결의했다. 그 중 기억에 남는건, 일본 군대와 대전 시에 그 허를 찌르거나 혹은 산간에 유인하여 필승을 기할 경우를 제외하곤 절대 전투를 게시하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말도 안되는 병력 차이에도 불과하고, 완루구전투, 어랑촌전투 등 6일동안 10차례에 걸쳐 치열한 전투 끝에 우리 독립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은 홍범도의 뛰어난 전력적 지휘 또는 리더쉽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 산 간 지역에서 일본군이 적군인 줄 알고, 서로 쏘아대 자멸했다는 전투에선, 적군이므로 쾌재를 부르기도 하였다.

 대단히 추운 겨울, 1,400여명의 독립군 덕분에, 국치 이래 가장 빛나는 항전이 되었다. 현재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는 무명의 청년들의 애국 정신에 의병 활동, 봉오동 전투에서 청산리 전투까지, 현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쩌면 펼치고 싶지 않은 역사의 단면들을 끝 없이 바라보았다.

 

 전설적인 인물 홍범도는, 대한독립 2년을 앞두고, 카자흐스탄의 연극 극장 수위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까지 아무도, 그를 전설적인 영웅 홍범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한일 연출가 태장춘에 의해, 간곡한 청언으로 홍범도 일지를 집필하게 되었으며, 이를 희곡으로 써서 1942년 초반 공연했다. 

 

 홍범도는 일지를 쓰는 것이나 자신의 인생을 연극 공연으로 만드는 일을 극구 사양했다. 항일 전선에서 수 많은 청년들이 피를 뿌렸는데, 아직까지 살아남은 자신이 전공을 독차지 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못하다는 겸사였다. 

 

 전투당시 일제 또한 자신이 맞서 싸운 적장 홍범도에 대해 외경심을 보이기도 했다. 비록 '섬멸' 의 대상이라지만, 마음속으로 호걸풍의 인품과 지략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무릇 장수로서 싸움에 나가 무예와 전술로 적을 이기면 가히 용장이라 할 수 있다. 용장이면서 또한 아군과 함께 적의 외경까지 받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영웅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속에 끼이게 된다. 국난을 당한 나라에서 산야의 이름없는 백성으로서 주어진 '장군'의 칭호로 불린 홍범도, 그는 사람 됨됨이가 소박하고 성실하며 청렴하고 명예를 탐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의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몸을 굽히는 것을 꺼리지 않아서, 봉오동 전투 전에 국민회의 군사 조직이 최진동의 부대와 연합할 때는 최진동의 아래 지위에, 청산리 전투 후에 밀산에서 전체 독립군이 통합할 때에는 서일의 아래 지위에 앉는 것을 사양하지 않았다. 그동안 청산리 전투와 홍범도 장군의 참모습이 참으로 너무나 오랫동안 가리워져 왔다. 

 

 "양대 독립전쟁은 한민족에게 우리도 일본군에게 대승할 수 있고, 계속 투쟁하면 반드시 한국에서 일제를 구축하여 조국 광복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데 큰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생은 하나 뿐이라는 모두 다 평등한 명제 앞에 절대 무가치한 죽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그를 지탱해주고 있을 공간 속 소중한 사람들이 있을진데, 떠나보내고 싶지 않을 간절한 생 앞에서 지키고 싶었던 조국, 그 땅 위에 사람 그 모든 것이 너무나 감사했던 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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