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 한나 아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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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 한나 아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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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 한나 아렌트 외 5인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잔다. 그녀는 자신을 물고 있는 부리가 된다. 그리고 용수철 뚜껑 같은 자연은, 시간과 도덕을 담고 아직 쿨렁쿨렁한 그 납작한 트렁크에 이 모든것을 채운다.곰팡이 핀 오렌지 빛 꽃 여성용 약품들, 납작 누른 여우 머리와 난초꽃 장식 밑으로 흉측하게 튀어나온 보디세아의 젖가슴 잘생긴 여자 두 명이 도도하고, 날카롭고, 미묘하게 논쟁을 벌이고 있다. 나는 정교한 문양의 크리스털 그릇과 마욜리카 도자기 너머로 궁지에 몰린 분노의 여신들이 먹잇감을 놓고 고함치는 소리를 듣는다. 여자들의 편견으로 가득 찬 언쟁, 내 등에 꽂힌 채 녹슨 그 오래된 모든 칼들을, 나는 당신에게 들이댄다. 나와 닮은 자여, 나의 자매여

 이 책은 여섯명의 철학자 혹은 각 국의 여성 학자를 소개하고 그들의 글을 옮겨 적은 책이다. 19세기 이후 노동계급 여성들의 사회운동 마르크스 페미니즘/ 1960년대 이후 서구의 급진적 페미니즘 주의/ 20세기의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지주의영향으로 다양한 소수자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투쟁의 역사 안에서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사람들의 글자에서 격동적인 태동이 느껴진다.

 하지만 현재 한국 내 페미니즘 담론은 대부분 디지털 매체,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익명성을 보장해, 자유로운 논의가 가능하지만, 사용자간의 갈등으로 이어지거나 중도를 용납하지 않는 공격적인 태도는 생산적인 논의를 불가능하게 한다. 수십년 후에는 여성 혐오, 남성 혐오를 넘어서 인간 혐오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을까? 소모성 짙은 양극단 대립의 주장들에 있어서 언사 없이 무심하게 살아갈 것 같지만, 최소한 자신의 도넘은 삿대질이 어디로 향하는지, 혹여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향해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본문 중에서)


 평생 아렌트를 사로잡은 화두와도 같은 글귀는 그가 박사학위 논문에서 다룬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 말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문젯거리가 되었다 자기 자신을 문제로 여기는 상태란 어떤 것일까? 아렌트는 자신에게서 어떤 이질감을 발견한다. 세상과 자신 사이에 낀 막을 느낀다. 문젯거리인 나는 결코 세상과 맞붙을 수 없다. 그러나 서걱거리는 이물감은 오히려 나를 선명하고도 분명하게 느끼게 한다. 결국 내가 자신에게 문젯거리임을 알았다는 것은 곧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야 만 했다는 것이다.

 즉, 이해하기로서의 사유는 세상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는 이해하려는 자와 세계를 맞붙여 변화 시키려는 행위다. 아렌트는 단언한다.

 나는 평생 그 어떤 사람들이나 집단을 사랑 한 적이 없다. 독일인이건 프랑스이건 미국인이건 아니면 노동계급이나 그와 비슷한 어떤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 친구들만을 사랑했고, 내가 잘 알고 믿는 유일한 종류의 사랑은 개인을 향한 사랑이다.

 규범이 숨통을 조인다면, 우리는 그런 삶에 문제 제기해야 한다. 규범이 부여한 가치와 인간적인 것의 기준에 물음표를 찍고 다시 물어야 한다 삶은 어떠한 것인가? 어떤 조건이 인간적인 것을 만드는가?

 타인에게 욕망을 인정받는 것은 왜 중요할까? 우리의 삶 자체, 욕망 자체가 인간으로서의 생존 가능성을 새안하고 유지하는 인정 규범의 존재에 의존한다. 또한 인정은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이 연결 되어 있다는 생각을 일깨운다. 다시말해, 나를 이루는 것들은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채워질 수 없다. 나는 타인과 연결되어 있기에 내 밖의 다른 것들을 거쳐서 그들과 더불어 존재 가능하다. 우리라는 유대감이 자아를 형성하므로, 유대감의 상실은 우리에게서 평정심을 앗아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인정의 문제는 인간으로서의 인정 즉, 이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갈 자격을 얻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우선은 생존의 차원에서 그리고 나아가 문화와 상징의 차원에서 우리는 공통체를 필요로 한다.

 젠더 이원론을 전제하는 페미니즘을 비판한다. 많은 페미니스트가 생물학적 운명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해도 여전히 페미니즘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젠더를 가정한다면 새로운 선택과 저항의 여지는 가로막힌다고 버틀러는 생각했다.

 평등이 의미하는 바가 남녀의 똑같은 대우를 의미하는가? 정의는 공정한 대우와 같은가?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이 단 하나의 여성을 그리고 정체성의 정치에 얽매여 보편적 통일적 여성상을 재현할 수 록 다양한 차이를 주장하는 여성들은 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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