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개의 죽음 - 장그르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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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어느 개의 죽음 - 장그르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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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의 죽음 - 장그르니에



 "나는 누군가에게 애착을 품고 싶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애착을 갖는 것은 좋다. 내 동류의 인간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소망을 들어 줄 상대가 없을 때는 개를 구한다. 개의 눈에는 그 누구도 절름발이가 아니고 추한 인간도 장님도 귀머거리도 아니고 몸이 기형이지도 않고 늙지도 않았다."

 프랑스 소도시를 여행하던 작가 장그르니에는 자신을 쫒아오던 떠돌이 개 '타이오'를 기르게 된다. 아이들이 던진 돌에 눈을 맞은 걸 보고는 자신이 데려다 키우겠다고 마음 먹은 것인데 시간이 흘러, 어느새 개에게 다가온 임종의 고통에 괴로워하다 결국 영원히 낫게 해주기 위해서 안락사를 시킨다. 그르니에는 그것이 정말 개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인지 회의한다. 또한 타이오를 잃은 슬픔을 잠재울 유일한 방법은 타이오를 회상하고 그와의 추억을 써내려가는 것이라고 말하며, 1955/5/15 ~6/12 까지 약 한 달 동안 쓴 아흔편의 짧은 단상집을 담담한 어조로 타이오를 추억하며 남겼다.

 추억에는 종의 구별이 없다. 우정 또한 마찬가지다. 나에게도 중학생 시절부터 함께 한 14년 된 요크셔테리어 한 마리가 있다. 까만 새끼강아지에서, 현재는 쿠싱 증후군, 기관지협착증이라는 요크셔테리어의 유전 질환을 앓고 있어 나의 손길이 늘 간절하게 필요하다. 상황이 와닿아서 그런지, 선집을 들게 되었고, '어느 개' 라는 것이 비단 내 개 혹은 그 개. 지구 반대편 어디서나 반복될 수 있는 개의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멸종하면 가장 먼저 멸종하는 동물 '개', 개는 문제 상황을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함으로 문제 상황을 해결한다. 오랜 세월 함께 지내니 인간같이 몇 마디의 대화 없이도 까미의 표정만으로 알 수 있다. 또한, 다른 종임에도 개를 보면 옥시토신 (모성 및 사회적 교류와 관련된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사랑 호르몬) 이 나온다. 사람의 옥시토신을 감지한 개에게도 이 호르몬이 나오는데 만오천년, 길게는 삼만년 동안 함께한 참 각별하고 신기한 타종간의 우정이다.

 짧은 선집 안에, 그르니에의 평등, 자유,구원, 죽음, 사랑등에 관한 끊임없는 질문들과 그의 고뇌 속에 담긴 철학이 있어서, 짧지만 강렬한 선집이였다. 비단 개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동물을 생각하는 마음은 우리들의 내면에 내포된 약자를 대하는 모습이다. 비인간의 존재도 배려하는 사회가 되길 바라며, 이러한 기본적인 토대 속에서 인간의 권리도 지켜지길 바란다. 

(본문 중에서)


 동물들은 매일 아침 당신을 찾아오고 애정을 표한다. 그들의 하루는 사랑과 신뢰의 행위로 시작한다. 동물들은 적어도 솟구치는 애정을 품고 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품는 애착은 상대가 주는 기쁨 뿐 아니라 상대가 야기하는 근심에서도 비롯된다. 그 상대는 전적으로 책임지고 지켜야 하는 장소가 있다면, 그 장소에 사는 사람의 운명이 모든 사람에게 달려 있는 동시에 당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그 곳이 성스러운 장소가 되는 것과 같다.

 누군가 죽고 나면 우리는 질문을 품게 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정녕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 의사 여러 명이 병자 한 명을 둘러 싸고 있는 고야의 그림이 있다 그림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사람은 어떤 병으로 죽게 될까?" 그는 죽는다. 확실하다. 이제 죽음에 명칭을 부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의사들의 관심사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다. 의사들이 '살수 없다.' 라고 선고하고 그와 같은 '살 수 없음'의 진단을 낫게 할 방법을 찾는 모든 시도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의사들은 목숨을 앗아 가는 자객의 정체를 찾는 조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자객은 대자연이다. 우리에게 첫번째 날을 선물한 자연이 마지막 날도 선물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죽음과 연관된 일이다. 이전이라면 나도 그런 연관성을 좋아 했을 테지만 지금은 정말 싫다. 만일 타이오가 살아있다면 지금 내가 그의 얘기를 쓰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타이오는 세상을 떠났고, 나는 그의 삶을 되짚어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다. 다시 한번 살게 해주고 싶어서일까?

 매일 구렁텅이 옆을 걸어가고 언제든 그 안에 빠질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은 하지만 무언가 거창한 계기가 있어야만 그 구렁텅이의 깊이를 가늠해 본다. 계기가 필요하니, 하지만 왜 꼭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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