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화집 - 석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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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썰화집 - 석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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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화집 / 그림꾼의 마감병 - 석정현



 "작가란 다른 사람의 일생을 표현하는 직업입니다. 그런 만큼 많은 사람들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지금도 생각나는 일화가 있는데, 으례 학창시절 예배시간에 펜과 종이가 있으면 한쪽 귀퉁이에 종종 낙서를 하곤 했다. 그 날따라 목사님께서 은주가 예배를 너무 열심히 듣는 것 같아보여 설교 중에 감동이 오셨다고 했다. 그리고 찬양 시간에 지나가시면서 내가 끄적인 휘황찬란한 낙서를 보았고, 더욱이 잘 그려서 황당하고 웃음이 나왔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후 진짜 글을 쓰고 있을 때에도 뜨끔 했다.)

 평소 그림에 대해 관심과 소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생땐, 큰 눈에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상큼발랄한 공주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중 고등학생땐, 통일 포스터나 과학 그림대회 같은 것에 참가해 장려상 정도의 한 두번의 수상 이력이 전부다. 대학생 떄는 학교 특성 상 교구 제작, 수업 자료를 만들었지만, 내가 미술에 대해 취미를 가지고 일정부분 시간을 쏟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의 마더' 라는 영화 속에서 드로잉된 그림을 보고, 나도 그러한 인물 드로잉 또는 풍경 스케치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막연한 생각이였지만, 펜과 종이만 있다면, 시간을 내 마음대로, 또는 자유자재로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멋있었다. 지금은 집 근처 화실에서 일년 넘게 그림을 배우고 있다.

 거의 대부분 모작을 그리고 있지만, 흰 종이를 채우기 전 나의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져있다. 현재의 감정, 상황, 관심사 등이 말이다. 그것들을 손 끝으로 채우면서 감정들은 곁가지를 뻗기도 하고 소멸해버리기도 한다.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성취감과 함께 이러한 생각들이 차분히 진정됨을 느낀다. 어디까지나 그림을 취미로 잡고 있는 나의 생각이지만 말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화실 선생님께서 책을 추천해주셨다. '썰화집' 석가라는 닉네임으로 널리 알려진 석정현 작가의 책이다. 그림에 생소한 나는, 작가의 책 제목 답게 썰 화집, 그의 그림들과 글을 자연스레 읽으면서 작가에 대해 알게되었다. 실제 그의 일러스트들은 유명하다. 매체 속에서 봤던2014년 고신해철님과, 세월호사망자 단원고 학생들의 모습이 담겨져있는 '아픔이 없는 곳에서' 라는 일러스트는 참담한 심정의 국민들의 마음을 울리고 어루만져 주기도 하였다. 또한 후배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10여년간 집필한 '석가의 해부학 노트' 도 그가 발간한 책이다.

 여기서 일러스트란 포스터나 전단지, 잡지, 책, 교과서, 애니메이션, 비디오게임,영화 등에서 사용되는 그림이다. 각각 매체에서 장식을 위해 사용되거나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일러스트레이션이란 단어는 깨우침, 영적이거나 지적인 계몽을 의미 하는illumination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접하고 시각적 이미지의 잔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중 어떠한 그림들은 마주하는 순간 사고를 더해 감정의 동요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세상은 늘 복잡한 것 같지만 삶은 참 단순하다. 또한 복잡한 생각 속에서 아주 단순한 선택만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이런 세상의 다양한 명제를 가지고 태어나는 수많은 직업들의 공통된 임무는 단 하나,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일념한다면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라고 믿으면서 작가님의 진심이 담긴 썰과 일러스트가 담긴 책 참 좋았던 것 같다.

(책 속에서)


 그러려면 일단 작업자의 주관적인 해석이나 욕심을 최대한 자제한 상태에서 레퍼런스를 최대한 많이 수집하고 흐름이나 트렌드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그런 생각도 듭니다. 만약 일러스트레이터가 의뢰인의 의도나 마음을 그렇게 잘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그림이라는 소통방법을 선택할 이유가 있었을까?

 새작업을 앞둔 그림쟁이 눈 앞에 내 과거의 실수가 실존한다는 것은 새까만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림은 찢거나 삭제하면 안된다. 그 결과물은 실패작이 아니라 진행작이고 흑역사는 훌륭한 연료가 되기 때문이다.

 뭐든 하기 전이 가장 무섭다.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갖가지 부정적인 케이스를 끌어모아 대처법을 구축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생존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상 겪고 나면 만만해진다. 그러니 쫄지말고 그냥 하면 된다.

 늙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 어린 아들의 옹알이를 알아 듣는 것쉽지만은 않은 퍼즐 게임을 놓지못하는 이유 보기만 해도 피곤한 복잡한 사진을 따라 그리기 / 어려우니까 재밌는 거야

 사람들이 서로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서로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은 결과의 예술이다. 그러나 원인을 함께 제시한다면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보다 잘난 사람을 훔쳐볼 수 있는 곳에 두는 것은 힘든일이 아니라 행운이다. 나의 불완전함을 인식할 수 있고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니까 진화는 멋진 것이다. 그 위대한 여정의 중간에 있는 모습은 무엇이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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