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는 꽃이 피네 - 법정스님 / 류시화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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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산에는 꽃이 피네 - 법정스님 / 류시화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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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꽃이 피네 - 법정스님 / 류시화 엮음




 처음에 우리가 이 책의 제목으로 삼았던 것은 이것이었다. "바로 지금이지 그때가 따로 있는것이 아니다."

 임제 선사는 또 말한다. '바로 지금이 다시 시절은 없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다른 시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삶과 죽음이 지금 이자리에서 이렇게 전개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불안과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것이다. 또 누가 미래를 두려워 하면서 잠 못 이룬다면, 그는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을 가불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과거 강물처럼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과거나 미래 쪽에 한 눈을 팔면 현재의 삶이 소멸해버린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항상 현재 일 뿐이다. 지금 이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다면 여기에는 삶과 죽음도 발붙일 수 없다. 저마다 서 있는 그자리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라!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작년에 제주도로 책방 여행을 다녀왔다. 어떠한 목적지가 뚜렷하게 있으니까 주변을 여행하면서 책방을 찾는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책방 마다의 분위기가 아직도 선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 중 '구들 책방' 에서 구입한, '산에는 꽃이 피네' 법정스님의 책. 내 책장에도 몇 권이 꽂혀있는 류시화 시인이 엮은 글이다. 작년 무소유라는 책을 운좋게 구입해서 읽고, 생에 대한 가치와 관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였었다.

 사실 현재라는 시간은 없다. 잠깐 움직이는 순간 곧 과거가 되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현재가 가장 중요하고, 현재를 살라고 말한다.
행복한 순간에 오는 현재는 영원한 순간인 것 처럼 기억되니까 말이다. 나에게도 과거 행복한 순간에 대한 잔상들이 남아있다. 아마 죽음 앞에 행복했던 무수한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갈지언데, 살아있는 동안 그러한 순간들을 많이 담고 싶다. 살아있다는 것은 오감을 모두 느끼는 상태임으로, 가능한한 피부로 느끼고, 호흡하면서 현재를 살고 싶다. 법정스님은 말한다. 살아가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을 바랄 수는 없다고, 생을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어머니의 따스한 품 속에서 무한한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고 이제 어떻게 죽느냐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추상적인 생의 과업 속에서 법정 스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살고 그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책을 통해 하게 됐다. 법정스님의 책은 모두가 꼭 필독했으면 좋겠다. ;)

 "내가 믿건데, 여기 모아 놓은 스님의 이 짤막한 어록집은 끝없이 행위를 추구하고 더 발전하고자 하고 속도 지향적이며 연거푸 생산하고 소비하는 우리의 문명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이다. 우리는 본질로부터 달이나 쓸데없는 것에 몸과 마음이 파묻히려는 습관적인 병에 걸려 있지 않은가" (류시화)

(산에는 꽃이 피네 중)

 

 거듭 말하지만 하나가 필요할 때 둘을 가지려 하지 말라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 마저 잃게 된다. 모자랄까봐 미리 걱정하는 그 마음이 바로 모자람이다. 그것이 가난이고 결핍이다. 

 

 인도 고전인 리그베다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가지로 말한다.' 기독교적인 사랑과 불교적인 자비는 사실 똑같은 것이다. 사람은 가볍고 자비는 무거운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문화적인 배경과 지역적인 특수성에서 다른 표현이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 말을 통해서 말 자체에 집착하게 되면, 뜻을 놓치고 모순에 빠진다. 열반경에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말을 따르지 말고 뜻을 따르라.'

 

 우리들 자신을 안으로 항상 성찰해야 한다. 안으로 되살펴야 한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이 될 것인가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잘사는 사람은 한 번 죽지만 잘 못 사는 사람은 수백번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인생을 아무렇게나 탕진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불교 경전은 말하고 있다. 입에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을 전부 말해 버리면 말의 의미가 말의 무게가 여물지 않는다. 말의 마게가 없는 언어는 상대방에게 메아리가 없다. 

 

 단순한 삶이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근원적인 눈을 뜨게 한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투철한 자기 억제와 자기 질서를 가져야 한다. 보지 않아도 좋을 것을 보지 말고 듣지 않아도 좋을 것을 듣지 말고 읽지 않아도 좋을 것을 읽지 말며 먹지 않아도 좋은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가려 가면서 적게 먹고, 적게 듣고, 적게 입고 적게 먹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성숙해지고 승화 될 수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또한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작은것과 적은 것이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크고 많은 것만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니까 늘 갈증 상태에 놓여있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소유해 버린다. 내가 무엇인가를 가졌을 때 그 물건에 의해 가짐을 당하는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마르쿠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풍요로운 감옥에 비유하고 있다. 감옥 속에 냉장고와 세탁기가 갖춰져 있고, 텔레비전 수상기와 오디오가 놓여져 있다.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자신이 그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 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풍요로운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이고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 서야 한다. 그런 물음과 대면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항상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한 마음이 청정하면 온 법계가 청정해진다는 교훈이 있다. 한 송이 꽃이 피어나면 수천 수만 송이의 꽃이 피어난다는 가르침이 있다. 이것을 추상적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집안에서 그 집 어머니나 아버지 또는 자식, 한 사람의 마음이 지극히 청정하면 메아리가 되어 모든 식구가 변화한다. 그러나 가정의 중심인 어머니의 마음이 불안하다고 해 보라, 그냥 아버지한테 불안이 전달되고 바로 자식들에게로 옮겨 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 가지에 이상이 생기면 나무 전체에 이상이 생긴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에게 자신을 만들어 준다. 이 창조의 노력이 멎을 때 나무도 사랑이라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온다. 겉으로 보기에 나무들은 표정을 잃은 채 덤덤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잠시도 창조의 일손을 멈추지 않는다. 땅의 은밀한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새봄의 싹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시절 인연이 오면 안으로 다스리던 생명력을 대지 위에 활짝 펼쳐 보일 것이다. 

 

 네덜란드 출신 명상화가 프레데릭 프랑크는 말한다. '진정한 예술은 예술이라는 것 너머에 있고, 진리는 종교라는 울타리 밖에 있으며, 사랑은 껴안는 행위 너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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