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 이회영 /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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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월 모일

우당 이회영 /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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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독립운동가 말꽃모음 책을 읽으며 이 일가, 가족에게 존경심이 생기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그 당시 이회영 일가는 10대 명문 가문이였다. 그럴 것이, 오성과 한음에 '이항복 선생' 의 10대 손이였으며 (오늘 날 국무총리 관직을 7번을 맡았다.) 그들의 가문은 정승, 판서, 재상을 한대도 거르지 않았던 명문가 가문이였다.

 지를 떠나 덕까지 갖춘 이회영선생은 나이 20세에 겸손을 알았다.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가 폐지되었어도 관행적으로 남아있는 노비 문화가 있었다. 이회영은 노비에게 먼저 존댓말을 건낸다.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은 노비들은 감동하여 이후 이회영 선생과 함께 모두 독립 운동가로 생을 마감한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언제까지나 교육과 백성계몽에 힘쓴 이회영 선생는 "1896년 독립 협회를 설립해 사회 정치단체로 민주주의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05년 을사년에 <이완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 이지용> 을사오적이라 불리우는 이들이 외교권을 팔았다. 나라에 있어 외교권이 없다는 것은 '나라가 망한다' 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였다.

 이에 이회영은 비분강개하여 고종을 은밀히 만나, 우리의 주권을 되찾고자 외국의 도움을 청하자며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란 도시에 만국 평화 회의에 우리나라의 사정을 알리고자한다. 이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외국어에 능통한 자들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다. 이 사실을 안 일본은 외교권이 없는 나라는 회의장에 참석할 수 없다고 전보를 보내며 헤이그 특사는 문전박대를 당했다. 이준은 화병으로 생을 마감하고 이상설은 사형, 이위종은 무기징역 판결이 남으로 그들은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외국에서 떠돌이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특사 파견으로 인해 고종은 퇴위를 하고 순종은 황제를 양위 받는다. 양위식엔 고종도 순종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일제는 일본 내관들에게 황제 옷을 입히고 대리로 양위식을 이행 하였다. 또한 이를 빌미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포기를 모르는 이회영 선생은 자신의 아이디어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책임을 느낀다. '군대가 없는데 어찌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까' 개탄하며 자신의 여섯 형제와 이야기 끝에 서간도 삼원보에 독립 운동의 메카 "신흥 무관학교"를 설립한다.

 *6형제 중 영의정의 양자로 들어간 이석영은 자신의 양주의 땅을 모두 헐값에 팔아들이는데, 현재 시세로 약 1000억에서 1500억 규모의 재산이다. 또한 이회영일가가 주거지는 명동이었으니, 그 땅의 금액만 해도 현재가로 어마어마한 재산이였으리라 추산한다*

 일본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명동의 땅은 제대로 처분도 못했으며 급히 돈을 마련해야하기에 600억인 금액으로 헐값에 매도한다. 12월 30일 영하 30도의 어마어마한 추위를 뚫고 갓 돌을 넘긴 아이를 동여매고 6형제 누구 하나 아무 불평없이 서간도로 이주하게 된다. 이에 자신들의 강을 건너게 해준 뱃사공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건내주게 되는데, 뱃사공이 거절하자 독립투쟁을 위해 많은 젊은이가 이 곳을 건너게 될 터이니 배 삯을 미리 지불했다는 후일담도 남겨져있다.

 독립군의 메카 '신흥 무관학교' 1911년 - 1920년동안 30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중 지청천 장군이 있으며 ( 이해를 돕기 위해 암살 속배우 전지현이 활약했던 저격수부대를 이끈 장군이다,)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 장군,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장군 등이 있다. 이외에도 20여개 학교를 설립했으며 위기엔 교육밖에 없다 라는 이회영 선생의 교육의 철학과 뜻이 담겨있다. 학비,식비가 무료인 이 곳에서 10년만에 600억이라는 돈이 후일 투쟁을 도모하는 돈으로 모두 지출되고 이회영 선생은 극도로 가난한 생활이 이어졌다. 부인의 서간도시종기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선생은 한달의 절반을 굶었고, 일주일에 세번 끼니를 챙기게 되면 운수가 대통한 날이었다고한다.

 폐교 이후 이회영 선생은 무장투쟁활동을 전개한다. (의로운 일을 맹렬히 행한다 라는 뜻을 지닌 '의열단' 을 조직하게 되는데 이 단원 중 일원인 김원봉과 김구 선생이 있다. 당시 김원봉의 현상금은 100만원, 김구의 현상금 60만원이다. 김원봉의 현상금은 '현재시세로 320억' 이 대목에서 일본 총독부에서 얼마나 이들을 두려워 했는지 알 수 있다. 

 

 종로경찰서, 조선총독부, 부산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본 왕궁까지 폭탄이 터지니 한명의 독립군 입군 소식에도 일본경찰들은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1932년 무장 투쟁 운동을 진행하고자 상해로 떠는 이회영 선생 일정에 앞다투어 먼저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치뤘다. 이에 선생은 권동군 사령관이 만주 지역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이회영은 66세의 나이로 만주로 떠나게 되지만 행방불명된다. 

 

 이후 가족들은 세줄짜리 기사를 통해 이회영 선생의 부고소식을 전해듣게 되는데 만주로 떠나는 뱃길에 군경이 정문에서 수상한 자가 있어 그를 붙잡아 감옥에 수감시켰는데 감옥에서 창살에 목을 매달아 자결한 이상한 노인이 있다라는 소식이였다. 하지만 자결은 일본의 조작이였으며 그의 행보가 정보유출로 일본에게 발각되고 4일 동안 66세 노인이 견디기 힘든 모진 고문을 받고 안중근 의사의 형이 집행되었던 뤼순감옥에서 순국하게 된다. 

 

 오직 조국의 독립만을 바랬던 이회영 선생과 그의 여섯 형제들, 이건영 상해에서 병사, 이석영 상해 빈민가에서 아사, 이철영 병사, 이호영 독립운동으로 행방불명 (일본군에게 가족 몰살) 이시영만이 유일한 생존자로써 광복을 보았으며 이승만 정권의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이승만 대통령의 명동 일대를 환급해주겠다는 제안에, 

 

이시영은 "그 돈은 이미 나라와 민족에게 바친것 입니다." 라고 과감히 거절했다. 

 

여섯 형제의 이야기를 듣고 또한 자신의 엄청난 재산을 과감히 조국을 위해 바치고 우리나라 독립 역사에 엄청난 기둥이 되었던 이회영을 기억하며 글 몇줄을 적어본다. '신흥무관학교 창설' 만 백성을 모아놓고 이러한 제안을 아무런 미련 없이 승락할 수 있고 이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완용은 당시 30억을 일본에게 은사금으로 받았으며 집을 제공 받고, 일본 관광이라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당시 나라를 뺏기고 자신의 언어와 이름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 무엇이 호사일까? 하지만 그 호사를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며 윤동주 시인이 가졌던 부끄러움을 모른채 살아갔던 사람들과 대비되는 그들의 발자국이 더욱 처연하지만 의로웠고 용맹했으며 후손들에게 선망과 존경을 가질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마땅한 일에 감복하고 통탄할 수 있는 세상이길 바라면서, 국민들이 이 형제들을 추모하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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