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곤경은 우리가 경험한 경악스러운 위기가 드디어 끝나고 이제는 사라졌다고 생각할 때 찾아온다. 인류가 경험한 역사상 가장 폭압적인 정권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1938년 이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 독재이고, 다른 하나는 1930년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볼셰비즘 독재이다. 두 정권 모두 산업화 과정을 겪으면서 뿌리 잃은 대중의 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처방을 갖고 있다는 선전으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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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유대인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600만여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학살했다. 1941년에서 1945년 사이에 당시 유럽에 살고 있던 유대인의 약 3분의 2가 학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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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볼셰비키 정권은 소비에트 국가체제를 단단히 굳히기 위해 억압을 정치적 수단으로 선택하고, 그 일환으로 강제노동수용소인 굴라크를 운영한다. 당시 인구 80퍼센트가 농부였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공산당 체제에 반대하거나 적합하지 않은 생각을 하거나 행동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억압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강제노동은 재교육의 수단이었다. 소비에트 정부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1934년에서 1953년까지 약 100만 명이 죽어나갔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600만에서 1,5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죽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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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엄청난 학살 규모는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할 정도여서 두 정권 이 몰락하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지금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까지 한다.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거나 생각하기 싫은 것은 현실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기려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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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totalitarianism)는 그 용어가 이미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전체(total)'와 연관이 있다. 우리 사회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사회를 평가할 수 있는 전체적 진리가 있다고 믿으며, 이 믿음에 근거하여 사회를 전체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전체주의는 유사종교적 이데올로기,과도한 정치적 야망과 과격한 행동을 추구한다. 이런 점에서 전체주의는,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얼어붙은 호수이기보다는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급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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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몰락으로 전체주의가 사라지지 않듯이 스탈린의 죽음으로 전체주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은 불가피하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곤경이 원래의 형태 - 반드시 가장 잔인한 형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 를 드러내는 것은 전체주의가 과거지사가 될 떄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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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정권과 볼셰비키 정권이 몰락한 오늘날 더는 전체주의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신나치주의와 새로운 파시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정치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의 이름은 놀랍게도 철저하게 잊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히틀러와 스탈린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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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철저하게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대중이 여전히 존재하고 또 전체주의적 경향이 발견된다면, 우리가 어떤 오류도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이념을 예언의 형태로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정치적 운동을 경계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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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해결책은 강한 유혹의 형태로 전체주의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생존할 것이다. 즉 인간다운 방식으로는 정치적, 사회적 또는 경제적 고통을 완화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면 언제나 나타날 강한 유혹의 형태로 생존할 것이다. 전체주의를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아렌트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인간다운 방식의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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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의미는 자유이다." -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어떻게 인간성을 파괴하는 전체주의적 경향을 극복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전체주의를 잉태한 현실을 이해해야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렌트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와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악을 보면 자연스럽게 악마와 괴물을 떠올린다. 하지만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의 모습은 악마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가정을 사랑하는 가장이었고 맡겨진 일을 훌륭하게 해내는 탁월한 공무원이었고, 법을 잘 지키는 시민이었다. 알렌트는 여기서 악이 사이코패스 같은 악한 존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데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히만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을 저지른 것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행위하면 결국 '악의 평범성' 에 노출된다는 아렌트의 인식은 전체주의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전체주의적 경향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인식과 맞닿아 있다. 현실을 생각하지 않으면 악을 불러오고, 악을 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악이기 때문이다. 아렌트 시대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멈춰서 생각하고, 우리가 무슨 행위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조언한다. 우리 시대는 무슨 행위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조언한다. 우리 시대는 불확실성의 시대이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고, 과거의 행위는 더욱 더 돌이 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현실 속에서 미래의 방향을 찾아내는 정치가 필요하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은 현실 속에 있다.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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